
타인능해(他人能解)

타인능해(他人能解)는 전남 구례에 있는 운조루의 쌀 뒤주 마개에 새겨진 글자다.

아무나 열 수 있다는 의미로 운조루의 주인이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를 사랑채 옆 부엌에 놓아두고끼니가 없는마을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쌀을 퍼줄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슬그머니 퍼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배려는 운조루의 굴뚝에서도 드러난다.부잣집에서 밥 짓는 연기를 펑펑 피우는 것이 미안해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요즈음 말로 하면 더불어 사는 정신, 봉사정신,보시報施정신, 오블리제 (Noblesse Oblige)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1)뒤주는 열고 (2)굴뚝은 낮춘 운조루는6·25전쟁 때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지리산 자락에 있었지만 화를당하지 않았으니 대대로 나눔을 실천했던 정신이 운조루를 지킨 셈이다.

운조루에는 유명한 뒤주가 하나 있다.이 뒤주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문구가 바로 '他人能解'이다.타인능해, 즉 "누구나 쌀 뒤주를 열 수 있다."

원통형의 이 뒤주에는 두 가마니 반의 쌀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마을의 굶주리는 모든 이를 위해 이 뒤주는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창건주 류이주님은 한 달에 한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울 것을 명했다고 한다.

운조루는 대략 이백여 석의 쌀을 소출했는데 어떤 시기에는 전체 소출량의 20%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대개는 매년 삼십여 가마의 쌀을 양식 없는 이웃들을 위해 내어 놓았다고 한다.

쌀을 얻기 위해 운조루를 방문하는 일은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혹여 다른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주는
중간사랑채와 큰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헛칸에 두었다.

주인들과 쉽게 마주칠 가능성이 낮은 곳에 뒤주를 두고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능하면 이 뒤주의 사용을 자제했던 모양이다.
자기보다 더 힘든 이웃들을 위해 운조루의 뒤주를 양보했다.
![[숨은 역사 2cm] '약자 배려' 구례 운조루, 빨치산 방화·약탈에도 건재](https://search1.kakaocdn.net/argon/0x200_85_hr/C7osr5kmKyu)
오히려 근면하게 노동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결국 뒤주를 개방한 운조루의 마음과 뒤주를 여는 일을 자제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동일한 것이었다.

동학, 여순사건, 6.25 전쟁 등 이 아름다운 마을은 지리산이라는
'큰 산 아래에 산 죄'를 수도 없이 치루었다.

그 힘든 시간을 관통하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비결은 상생이었다.

구례 운조루-조선후기의주택/타인능해/금환락지/오미리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금환락지(金環落地)란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선녀가 땅에 내려와 목욕하고 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 한다.

운조루 행랑채 대문과 나란히 양쪽으로 길게 행랑채가 있는데
지금은 이곳이 한옥체험 민박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운조루 앞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지리산 노고단이 주산(主山)이요
좌청룡(左靑龍)은 왕시루봉, 우백호(右白虎)는 형제봉이다.
그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비도 잠시 그치고 지리산 자락의 운해를 바라보니 명당 마을의 정기가 느껴졌다.

대문위에 걸려 있는 왼쪽은 호랑이뼈 오른쪽은 말뼈이다
이것은 이곳에 드나드는 모든 액운을 막아준다는 의미로 사용 되지 않았을까 싶다
본래 호랑이뼈는 누가 훔쳐가서 말뼈가 걸려 있다는 얘기도 있으나 살고 계시는 할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왼쪽것은 호랑이뼈이고 오른쪽에는 말뼈라고 하신다

이곳 사랑채 오른쪽 옆으로 들어가면 우리에게 이 고택과 더불어 잘 알려진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나무로 만들어진 쌀독이 놓여져 있는 곳이다

사랑채 앞으로 몽글몽글 하얀꽃을 피우는게 예뻐서 무슨꽃 이냐고 여쭈어 보니
싸리개 나무라고 하시면서 할머니께서 사다가 심어 놓으신거란다
이렇게 이곳을 지키며 곳곳에 사람의 정성어린 손길이 닿은 곳이니 오늘날까지도 이처럼 잘 보존되어 있지 않나 싶다

사랑채 앞에 있는 싸리개 나무에 하얀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이 경사로를 올라가면 바로 타인능해 라고 하는 쌀독이 있는곳이 나온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드나들게 하기위해 이렇게 만들어 놓은것이란다
그 옛날에 이런것까지 마음을 썼으니 역시 다름이 느껴졌다

안채를 통하지 않고도 바로 이 쌀독이 있는곳을 출입 할수있게 사랑채에 만들어 놓고
또 쌀을 직접 퍼 주지 않은것은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하는 배려 에서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
저 쌀독에는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데 항상 가득채워 놓고 끼니가 떨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퍼 갈 수 있게 하였으며 구멍을 작게 만들어 놓은것은 혼자 욕심내어 너무
많이 가져가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남겨두라는 의미에서란다.

지리산 자락은 공비활동과 그 토벌작전이 심했던 곳이다.
각종 민란,동학,여순사건,6.25전쟁 등 힘든 역사의 시기를 지내오면서도
운조루가 지금처럼 건재할 수 있었던것은 바로 가진자의 노불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옛모습을 지키며 나란히 서 있는 지게

이곳이 안채이며 지금도 살림을 하고 있는 공간이다.

운조루(雲鳥樓 이름은 “돌아가자, 전원이 묵는데 어이 아니 돌아가리
(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로 시작하는
도연명의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구름은 무심히 골짜기를 나오는데 (雲無心以出岫)
날다 지친 저 새 돌아올 줄 아네 (鳥倦飛而知還)
구름과 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안채 건물에는 이렇게 이층형식으로 다락방 같은것이 있는데 이것은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안채 여인네들이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지어진 구조이다

안채 마당에 이렇게 장독대가 놓여져 있다

그 장독안에는 된장 간장을 담가 놓으셨다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계셨다
간장은 미리 담아서 들어오는 대문입구에 된장은 이렇게 그때그때 통에다 담아 주신다
된장 담는것에도 넉넉함이 있으셨던 분이다. 조금이라도 덜 주려는것이 아니라 꾹꾹눌러가며 가득 채워 주시려는 마음에서... 할머니께서 직접 담그신단다예전 친정엄마 손맛이 그리워 된장 두통 간장 한병 사서 낑낑 거리며 들고 왔다~~ㅎㅎ
행랑채 한옥 체험 민박을 하는 방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