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필 때

마음의 양식/부처님 곁으로

초의선사(草衣禪師)

봄 향기 2018. 5. 25. 06:02

                     초의선사(草衣禪師)
    출생 - 사망1786년 ~ 1866년
    이명 : 초의(艸衣, 일지암(一枝庵)
    본관 인동(仁同)성은 장(張)씨이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인 초의선(1786~ 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초의를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10년)에 태어난 선사는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초의선사 진영과 추사 글씨 「명선」, 수연당 정명자(대한명인)의 자수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가 삼장()을 배워서 통달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 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 유배생활 하는 24연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를 익히기도 하였다. 물론 초의승려는 다산 선생께 다선()의 진미를 더하였을 것이다. 다산은 『각다고』를 쓰고 초의는 『동다송()』을 지으며 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으니 한국의 다도는 이렇게 두 분을 만나 중흥하게 된다.

    초의의 사상은 선()사상과 다선일미()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 안에 부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승려에게는 차()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을 지어 우리의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였으며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실사구시를 표방한 정약용의 영향과 김정희와의 교유()에서 얻은 힘이라고 보고 있다.

    1866년 나이 81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과 교()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맑은 차 한 잔의 맛과 멋을 초의는 이렇게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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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초의대선사 상]

    -초의선사- 『동다송』 제16송 의역한 것이다.

    초의선사 [草衣禪師] (차생활문화대전, 2012. 7. 10., 홍익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