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필 때

마음의 양식/부처님 곁으로

머리 긴 속인이 해인사 선방에 들었다

봄 향기 2019. 1. 17. 06:24



          ▲ 영주는 범술 스님의 권유에 대원사 탑전을 나와 해인사로 향했다. 그리고
             속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눈 쌓이는 집’ 퇴설당에 들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머리 긴 속인이 해인사 선방에 들었다 - 성철큰스님 평전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주지 고경의 배려로 유발속인 영주는 선방에 들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선방은 퇴설당(堆雪堂)이었으니 바로 ‘눈 쌓이는 집’이었다. 이 당우명은 선종 제2조 혜가 스님의 구도와 관련된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퇴설당 벽에는 혜가의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선승이 ‘눈 쌓인 집’에 들어 번뇌를 베어냈을 것이다."

    “속인이 대원사에서 무섭게 정진하고 있다.”

    소문은 바람처럼 빠르게 산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대원사의 대처승들은 불편했다. 영주의 치열한 공부는 자신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젊은이가 탑전을 점거하고 ‘참선 시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원사 대처승들은 큰절 해인사에 공문(편지)을 보냈다. ‘젊은이가 대원사 탑전에 들어 공부하고 있는 바 수행정진의 자세와 기세가 범상치 않으니 해인사로 데려가 크게 지도함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해인사에서 스님이 찾아왔다. 총무 최범술(효당 스님, 1904~1979)이었다. 범술은 이미 항일운동에 참여해서 몇 차례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훗날 해방공간에서는 불교 교단의 총무부장을 맡았다. 제헌의원에 뽑힌 정치가였으며, 여러 학교를 세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왜색에 물든 대처승이었다. 커다란 저수지가 오염되었으니 그 안에서 누가 멱을 감아도 맑을 수가 없었다. 청년시절에는 서릿발 같은 서원을 했겠지만 현실에 부딪혀 조금씩 무뎌져 갔을 것이다.

    범술은 영주를 해인사로 이끌고 싶었다. 병약해 보이지만 흰 얼굴 속 커다란 눈동자는 사람을 빨아들였다. 해인사에는 당대의 선지식 백용성 스님과 제자 하동산 스님, 송만공 스님, 불교계 석학 김법린 등이 있었다. 그들이 영주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범술은 영주에게 간곡하게 권했다.

    “해인사는 절도 크고 불법이 고여 있으니 같이 가면 어떻겠는가. 큰스님들이 자네를 보고 싶어하네. 함께 불법을 공부해서 불교를 일으켰으면 좋겠네.”

    하지만 영주는 이를 간단히 뿌리쳤다.
    “여기 대원사도 산이 깊고 조용해서 공부하기 좋습니다. 일부러 해인사까지 갈 필요 있겠습니까.”
    범술 또한 물러나지 않았다.
    “이곳과 해인사는 많이 다르다네.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법보 종찰이 아닌가. 아마 자네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네.”

    그날 밤 영주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 해인사가 떠올랐다. 큰절에서는 어떻게 살림을 하고, 승려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경험한 선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싶었다. 대원사의 풍경소리를 붙들고 여러 생각을 했다.

    ‘해인사로 가면 영원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범술 스님이 얘기한 것처럼 해인사에 들면 특별한 불법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대원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범술은 떠나갔다. 영주는 또 여러 날 고민했다. 사실 큰절에서 ‘실세스님’이 다녀갔기에 대원사 승려들의 시선이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마침내 짐을 꾸려 탑전을 나왔다. 1935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해인사 가는 길이 불가에 드는 길임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들을 지나 계곡에 이르자 느낌이 이상했다. 단풍이 물에 비쳐 흐르는 물조차 붉다는 홍류(紅流)동 계곡은 겨울에도 범상치 않았다. 기묘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나타났고, 붉은 소나무들이 청년 영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소리가 최치원 선생의 귀를 먹게 했다는 계곡은 엄동이라 그 소리까지 얼어있었다. 그래도 침묵의 기세가 비범했다. 농산정, 낙화담, 분옥폭포, 무릉교 등을 지나 해인사 경내로 들어섰다. 그렇게 지리산을 나와 가야산에 들어갔다.  

    해인사는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였다. 절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비롯됐다. 해인삼매란 어리석음의 바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멈추면 참 지혜의 바다(海)에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우주의 참된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해인사는 순응 스님과 그 제자인 이정 스님이 신라 애장왕(802년) 때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균여, 의천 같은 고승을 배출했다. 해인사는 일제 강점기에도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와 함께 선승들에게 방을 내주는 귀한 사찰이었다.

    해인사는 영주의 생각보다 크고 근엄했다. 스님들의 걸음걸이부터 달랐다. 무엇보다 장경판전이 아무 장식도 없이 소탈하게, 또 긴 세월 무탈하게 서 있음이 미더웠다. 장경판전이 대적광전 뒤에 있음은 해인사가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들고 있음이었다. 영주가 범술 스님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대뜸 주지스님을 찾아갔다.

    “대원사에서 왔습니다.” 
    “오라, 바로 그 청년이구만.”

    주지는 환한 표정으로 맞았다. 당시 주지는 이고경(李古鏡, 1882~1943) 스님이었다. 강경(講經)이 유려하고 몸가짐이 반듯했다. 성철은 훗날 당시의 고경을 “화엄학에 밝은 유명한 스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다면서 해인사에서는 어떤 공부를 해보려 하는가?”
    “중은 싫지만 부처님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참선을 해서 그 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주지는 무례한 유발청년을 지긋이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나와 한 밤 자면서 얘기해 봅시다.”

    그렇게 주지 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영주는 큰 절의 산중 생활이 궁금했다. 고경은 새삼 유발청년이 대견했다. 불교계는 인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막 불교 속으로 들어가는 청년에게 부처님 얘기만 할 수는 없었다. 현실을 알려줘야 했다.

    “나라꼴도 그렇지만, 불교도 주인이 없다네. 이리저리 손을 타고 있으니 큰일이야. 부처님 법을 모시고 있는 여기 해인사도 그리 맑지만은 않다네.”

    고경도 영주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주는 주지의 고뇌가 손에 잡힐 듯했다. 다음날 고경이 원주를 불러 영주를 선방에 들게 하라 일렀다. 그러자 원주는 순간 표정을 바꾸었다.

    “속인을 선방에 들인 일은 없습니다. 하물며 선승과 함께 나란히 앉아 참선을 하게 한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지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청년은 다르네. 다 그만한 뜻이 있으니 따르게.”
    원주는 주지와 영주를 번갈아 보더니 획 돌아섰다.
    “알 수 없는 일이네. 나를 따라오시오.”

    고경은 처음부터 영주의 그릇을 알아봤다. 해인사에는 고경을 따르는 승려들이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말년이 험했다. 해인사 대중이 고경을 다시 주지에 선출했지만 총독부는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종권은 친일파 대처승에게 넘어갔다. 친일승들은 고경이 눈에 가시였다. 강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며 항일정신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밀고했다. 왜경은 고경과 임환경(林幻鏡  1887~1983) 스님, 그리고 젊은 승려들을 잡아갔다.
    고경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형사들은 한 번 묻고 열 번을 때렸다고 한다. 고경은 끝내 옥에서 입적했다. 그리고 죽어서도 친일승이 장악하고 있는 해인사에 들지 못했다. 1943년 새해 합천 남정강 강변에서 다비식이 있었다. 말이 ‘다비’였지 그저 송장 태우기였다. 후미진 겨울 강가에서 조선불교가 불타고 있음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지인들은 가슴을 쳤다. 날카로운 강바람은 몸보다 마음을 후볐다. 시신을 태우며, 또 재를 쓸어가며 강바람도 소리쳤다. 흡사 울음 같았다.

    주지 고경의 배려로 유발속인 영주는 선방에 들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선방은 퇴설당(堆雪堂)이었으니 바로 ‘눈 쌓이는 집’이었다. 이 당우명은 선종 제2조 혜가 스님의 구도와 관련된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혜가의 속명은 신광(神光)이었다.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좌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몇 번이나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달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신광은 눈 오는 밤 소림사 마당에 서 있었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그러자 비로소 달마가 물었다.

    “눈 속에 그토록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감로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구해주소서.”

    “부처님 도는 오랫동안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데 어찌 작은 지혜와 가벼운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헛수고일 뿐이다.”

    달마의 말을 들은 신광은 홀연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잘랐다. 눈 위에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달마가 말했다.

    “부처님들은 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었다. 팔을 잘라 내놓으니 이제 도를 구할만 하다.”

    달마는 신광에게 혜가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고 법을 전했다.

    퇴설당 벽에는 혜가의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선승이 ‘눈 쌓인 집’에 들어 번뇌를 베어냈을 것이다. 영주가 이를 바라봤다. 그림이 묻고 있었다.

         “눈 오는 밤, 너는 팔을 자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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