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필 때

마음의 양식/부처님 곁으로

새벽편지 / 깨달음

봄 향기 2019. 1. 5. 07:12


< 질문 >
“지금 당장 깨달아 마치라”는 말씀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당장 깨달아 마칠 수 있습니까?


< 답변 >

보통 범부가 ‘깨닫는다’는 말을 쓸 때에는 당연히 ‘깨닫는 자’가 있고 ‘깨닫는 바’

있게 마련이오. 그래야지 그 어간에서 깨달음이 이루어질 것 아니겠소?

이 얘기는 무슨 말인고 하니, 능소(能所),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 이런 것들이

본래 참된 하나를 멋대로 둘로 나누어 이것과 저것을 서로 마주보는 대립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소리요. 하지만 잊지 마시오.

만법의 성품은 몽땅 비었기 때문에 한 성품이고, 한 성품이기 때문에 평등하오.

그러니 거기에는 깨달은 자도 깨달은 바도 따로 있을 수 없는 거요. 그게 진실이오.

 

“해탈의 도를 알고자 하면 모든 법이 서로 도달하지 못함을 알라”는 게송이 있소.

만법이 서로 이르르는(到) 일이 본래 없다는 소리요. 가령 ‘뭔가를 본다’고 할 때에는

저 밖의 그 빛이 내 눈의 망막에 와 닿아야 ‘본다’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지 않소?

주관과 객관 두 존재 사이에서 서로 상호관계가 이루어져야 관찰행위, 소위 ‘본다’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철썩 같이 여겨왔는데, 사실은 주관이고 객관이고 모든 법

몽땅 비어서 이름만 그러할 뿐이라면, 즉 모든 법이 서로 이르르는 일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 · · · · · 뭐겠소? · · · · · ·

 우리가 지금껏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지각 작용이 전부 헛소리라는 얘기요.


그래서 수산주(修山主)가 이어서 읊은 거요.

“눈과 귀가 보고 들음이 끊겼거늘, 소리와 빛은 끝없이 시끄럽다.”


묶인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잘못 알지 마시오.

그리 아는 것은 세속법이오. 만약 여러분이 만법이 성품 없는 도리를 꿰뚫어서,

고(苦) 싫다고 할 것 없고 낙(樂) 좋다고 할 것 없어서, 고와 낙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던 그 끝없는 진동이 영원히 끝난다면 그것을 일러 해탈이라고 하는 거요.

여러분은 손 안에 해탈의 열쇠를 이미 쥐고 있소.

만법이 성품이 없다는 사실. 그 진실을 말로써가 아니라 바닥까지 철저하게 사무쳐서

스스로 체득하지 못한다면 깨달을 분수는 영영 없는 거요.


- 대우거사 / 가산님 제공



새벽편지 ...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